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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0-03 06:16
1987년 5월 6일 수요오후집회 말씀(재독)
 글쓴이 : 박완배
조회 : 53  
87050632수후(집회).mp3 (23.5MB )
 
 

출간진행 (결재. 재초타. 재초교. 재재타. 재재교. 재내용교. 재출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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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5. 6. 오후집회 (수)
본문:히브리서 10장 19절∼39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하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성소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을 말하는데 예수님의 대속의 피공로, 사죄 칭의 화친의 대속 공로를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에게 담대히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대속의 이 죽으심을 죽으신 것은 사람만이 아니고 하나님만이 아니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와 사람인 동정녀 마리아 탄생 이 인성이 일위가 돼 가지고, 한 격위가 돼 가지고 이렇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죽으신 것은 세 가지를 인해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죄를 지었음으로 죄와 사망과 마귀에게서 영원한 종되어 있고 사망되어 있는 데에서 그 형벌을 예수님이 대신 받으심으로 우리를 거게서 구출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형벌을 받으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는 형을 받지 안했지마는 대신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죄의 값을 다시는 내지 안해도 되도록 됐습니다.

예수님이 내 대신 죽으심으로 나를 영원한 멸망에서 구출하셨기 때문에 남아 있는 나는 내것이 아니고 이것은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주님의 것입니다.

또 주님이, 우리가 하나님의 그 법을 다 준행해야 영존할 수 있고 영생할 수 있는데 그 법을 우리로서는 다 준행할 수 없습니다. 무한하신 분이 입법해 놓은 것이요 요구한 것이기 때문에 무한자만이 그를 감당할 수 있지 제한된 우리들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영원히 자유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대신 우리에게 해당된 모든 하나님의 입법을 행하셨습니다.

행하시는데 그 일을 행하시는 걸 행하지 못하게 할라고 사탄이 역사하다가 예수님은 죽기까지 계속 행하심으로 죽으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공법을 완수한 자가 되었고 악령은 완수하는 것을 방해하는 자가 되어서 그는 멸망하고 예수님은 완전히 완수해서 하나님의 공심판을 통과한 하나님의 의를 이루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대신 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의가 되었고 죽으심으로 우리 대신 죽으셔서 그 이룬 의를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그 의는 우리 것 되었고 남아 있는 우리는 예수님의 것이 된 것입니다.

대신 행함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것 됐고 또 하나님과 원수된 것을 화친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대신 화목의 제물이 되셔 가지고 죽으셨습니다. 화목의 제물이 되어 죽으심으로 그 화친한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아무 공로가 없지마는 예수님이 대신 해 주신 그 공로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친이 됐습니다.

이래서, 예수님의 피는 이 세 가지를 우리 대신 했기 때문에 대신 하셔서 설정해 놓은 그 세 가지 공로를 우리 것 삼았는고로 그 공로는 우리 것 됐고 나는 주님의 것이 된 것입니다.

기본구원적으로는 우리가 이해하든지 안 하든지 그것도 하나님의 객관 역사로 하셨기 때문에 상관없지마는 우리의 건설구원에 있어서는 우리가 예수님이 대속하신 것을 믿어야 하고 또 대속하셨으니 대속을 받은 나는 주님의 것인 것을 믿어야 하고 그러기 때문에 이제 남은 때에 사는 것은 내대로 내맘대로 내것으로 나로 살면 예수님의 대속은 건설구원에 있어서는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이 내것된 동시에 나는 완전히 주님의 것이 되어지는 데에서 대속의 공로는 내것이 되어서 이 공로가 내게 효력있게 역사를 합니다.

그러나 내가 이 대속의 공로는 내것 삼았다 하고 내 심신은 내나 자기 것으로 가지고 있으면 남의 물건 가져오고 물건값 안 주는 거와 같이, 그라면 도로 물건을 돌려야 되는 거와 같이 아무리 예수님의 대속을 제가 믿고 인정한다 할지라도 자기가 주의 것이 아니고 자기 것은 자기 것으로 그대로 있으면 주님의 대속은 다시 주님의 대속으로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건설구원에 있어서는 이러합니다. 기본구원에 있어서는 완전히 하나님께서 이 일을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의 주관은 상관이 없습니다. 이래서 기본구원에 대한 신앙과 건설구원에 대한 신앙은 다릅니다.

우리는 실질적으로 예수님의 대속이 내것인 것을 믿고 그대로 행동하고 그 대속을 힘입어 그대로 살아야 대속의 능력의 효력이 우리에게 역사할 수가 있고 또 그런 데에는 나는 당신의 것인 것을 알아 당신에게 완전히 바쳐서 나는 내가 주장하지 안하고 당신이 나를 주장하는 이 생애가 될 때에 그 대속은 우리에게 그대로 보존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구원을 아무리 알고 믿는다 할지라도 내가 그 대속의 구원을 인정하고 그 대속의 구원을 입고 살지 안하면 소용 없습니다. 입고 살아야 되지 실상의 그 생활에 있어서는 대속을 다 벗어버리고 대속 없는 자로 살면 대속이 효력이 없습니다. 대속을 입고 살아야 됩니다.

또 대속을 입고 살 뿐만 아니라 나는 당신의 것이 된 것을 인정하고 당신의 것으로 당신에게 바쳐서 당신이 자유대로 하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에 건설구원과 기본구원은 다릅니다. 사람들은 이 두 구원을 혼돈시켜 가지고 ‘예수님의 구원을 자기가 알고 인정하고 믿는다고만 하면 행동은 아무리 해도 관계 없다. 또 대속의 공로는 내것이요 나도 내것이라.’ 이거는 남의 것 가져오고 대금 안 치르면 도둑질인 거와 마찬가지로 그래 되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공법에서 대속이 자기의 것이 되지를 못합니다.

그러기에 택함 받고 중생 받은 사람이라도 실지의 생활에 있어서는 대속이 자기에게 아무런 효력이 있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대속을 대속으로 대우하지 안하고 대속을 입고 대속 받은 자로 살지 안하기 때문에 대속의 효력이 그에게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대속을 자기가 입고 산다 할지라도 자기가 주님의 것이 아니면 자기 것으로 되어 있으면 자동적으로 필연적으로 대속은 다시 자기에게는 벗어지고 상관이 없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대속을 입어 주의 것 된 내가 나 위해 살지 안하고 주님으로 인하여 살 때에 건설구원이 바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걸 가리켜서 “피를 힘입어” 하는 것은 세 가지 대속을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담력을 얻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데에는 죄가 없어야 가는데 사죄로 인해서 죄 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고, 의로운 자라야 갈 수 있는데 예수님이 대신 행하신 이 공로로 의를 가진 자 되어서 갈 수 있고, 하나님과 원수된 자는 하나님께 가지 못하는데 하나님과 화친된 자만이 갈 수 있는데 예수님의 대신 화목 제물로 인해서 하나님과 화친된 자로 하나님에게 담대히 출입할 수 있습니다. 요것을 믿어야 됩니다.

어제도 어떤 사람이 모르고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면 다가 아니냐?’ 이렇게 말한 데 대해서 많은 설명을 했었습니다. 그분도 깨닫고는 속속들이 어느 정도 깨달았는지 몰라도 기뻐하고 돌이킨다는 그 간증하는 것을 제가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수십 년 믿고 목사 장로가 돼도 대속의 교리와 신조를 깨닫지 못해서 허무한 신앙을 가지고, 믿는다 하나 항상 저는 제것으로 살고 예수님의 대속은 말뿐이지 예수님의 대속을 입고 사는 것은 이것은 죄 속에서 의롭게 사는 것이요, 악 속에서 선으로 사는 것이요, 마귀의 소굴에서 성령으로 사는 생활이기 때문에 쉬운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 생활 할라 하면 있는 것을 다 내어놓아야만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교리와 신조를 바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그 사람은 제맘대로 살고 구원은 제것으로 이렇게 여깁니다.

천주교는 우리가 제재받는 그런 제재를 하나도 받지 않습니다. 예수님 믿는 이 개혁교 교인들 가운데서도 이 교리를 바로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제재받을 것이나 억제받을 것이나 고통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제 맘대로 자유하고 살 수 있습니다. 이러기에, 그 누룩 비유에 하나가 들어 있어도 전부가 다 더러워진다 했는데 교리 하나 잘못돼도 전구원은 다 실패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교리와 신조, 교리라 말은 깨달음이라 말입니다. 성경 보고 깨달음이라 말을 교리라 그리 말합니다. 자기가 이 교의 이치를 아는 그것을 한 말로 말해서 신학 술어로 교리라 그렇게 말합니다. 신조라는 것은 자기가 어떻게 하나님에게 대해서 모든 계약에 대해서 믿는 것을 가리켜서 신조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기에 이거 잘못 알면 다 헛일이 됩니다.

잘못 아는데 있어서 잘못 가르친 목사가 책임 있고 또 신앙 지도자가 책임이 있고 하는 것은 그것은 지도자 책임자가 제 책임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책임상 상당한 심판을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그 사람이 심판 받는다고 해서 잘못 배워 가지고 잘못 구원 이루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효력은 없습니다. 자기를 망치기는 했지마는 자기를 구원시키는 힘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가르친 사람에게 책임이 있지’ 그렇게 전가하면 자기만 망합니다. 목사가 잘못 가르치면 밑에 장로 전도사라도 바로 알아야 되겠고 반사라도 바로 알아야 되겠고 반사도 다 잘못 알면 자기 개인이라도 어떻게 하든지 알아서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행해야 구원은 이루어지는 것이지 삐뚤어지면은 구원은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가 기도할 수 있고 또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의논할 수 있고 또 하나님에게 모든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보호를 입고 하나님과 이렇게 더 이상이 없는 흠이 없는 완전한 친교를 가진 것은 예수님의 공로 때문인 것입니다.

이 친교를 가졌습니다.

영은 이 친교를 가져서 완전 구원을 얻었고 이 심신은 영의 구원 얻은 이 주격 구원을 힘입어서 자기가 행위구원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이 행위로써 대속을 입어야 행위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행위로 입어야 됩니다. 아무리 대속을 입었다 할지라도 행동은 대속 벗은 행동하면 상관이 없습니다. 대속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또 아무리 대속을 입었다고 자기가 알고 대속 입은 행동을 한다 할지라도 제가 제것으로 남아 있으면 또 소용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 두 각도를 똑똑히 구별해야 됩니다. 주님이 대신 하셨으니 내것인 것을 확실히 믿어야 되고 대신 해서 나에게 줬기 때문에 나의 남은 것은 당신의 것인 것을 똑똑히 믿어야 됩니다.

요 둘이 정확지 안하면은 우리 실생활에 대속의 효력은 와서 역사하지를 못합니다. 역사할 수도 없습니다. 왜? 제맘대로 자행 자지하고 있으니까 어떻게 이 대속이 붙잡을 수 있습니까? 붙잡아서 강제하면 그거는 자유의 구원은 안 됩니다. 완전성의 구원은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는 하나님이 해 주고 싶어도 해 주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20절에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그 길은 예수님이 대속의 공로로 베풀어 놓으신 그 공로의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 가운데라 말은 구약 이스라엘의 성막과 성전을 인용해 가지고 우리에게 신령한 도리를 가르치려고 하신 것입니다.

구약 성소는 지성소 성소가 있어서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휘장이 가리워 있어 그 휘장에는 짐승의 피를 가지고라야 그 휘장을 열고 들어가지 그리 아니면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랬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에 그때의 성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으로 그렇게 하나님 섬기는 곳으로 정해 놓고 있는 그 성전 휘장이 손대지 않고 위로부터 짜개져서 갈라졌습니다.

이거는 사람 손대지 안하고 그란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리워져 있는 장벽은 이제 무너졌다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과거 짐승의 피를 가지고 휘장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은 예수님을 예표한 예수님의 그 그림자가 되는 모형이 되는 짐승으로 대속해서 예수님의 대속을 예표로 하나의 모형적으로 이렇게 해서 하다가 예수님의 그 대속으로 실상의 대속이 완전히 이루어졌기 때문에 예표 대속, 예망 대속, 모형 대속 그 대속은 그때에 완성이 됐다는 표로 손대지 않고 성전 휘장이 갈라졌습니다.

그래서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저의 육체라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하신 예수님의 대속 제물이신, 예수님의 그 대속 제물이신 육체를 가리켜 말합니다. 그러면 그 휘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은 죄 담인데 어찌 예수님의 육체가 그 휘장이 되는가?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다 담당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다 담당하셨는고로 그 휘장은 예수님의 육체가 됐습니다. 예수님의 육체가 그 죄의 형벌을 완전히 다 받아서 죽으심으로 인해서 형을 다 받았기 때문에 그 죄가 없어진 표로 휘장이 갈라졌던 것입니다.

21절에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있다 그말은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영계와 물질계에 있는 모든 피조물은 다하나님의 집이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있다 그말은 영계와 물질계의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소유로 하나님의 집인데 그것을 책임지고 관리하는 중보자 제사장이 있다 하는 것은 이 제사장은 곧 예수님을 가리켜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당신이 다 받으셨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7절 이하에 보면 “하늘에 있는 권세와 땅에 있는 권세를 다 내게 주셨으니”라고 말씀을 하신 것은 당신이 이제는 하나님의 집에 대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의 집을 총책임 맡고 계시는 심판주도 되고, 또 대제사장도 되고, 집 맡은 대리 주인도 되고, 장자도 되고 그러합니다.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마음에 뿌림을 받아’ 하는 것은 예수님의 대속을 마음으로 알고 깨닫고 인정하고 믿는 걸 말합니다. “마음에 뿌림을 받아” 마음이 그 대속의 공로를 인정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대속의 능력이 와 가지고 그 마음을 완전히 새 마음으로 만들어서 살리는 역사를 착수했다 그말입니다.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과거에도 양심은 있었고 지금도 불신자의 양심도 모든 이종교들의 양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양심이 다 자기 종교적인 양심이요 또 세상 사람은 각각 자기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그 지식대로의 양심이기 때문에 지식이 종류가 많으니 양심의 종류도 많게 됐습니다. 지식이 죽은 지식이 많으니 죽은 양심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래서 “양심의 악을 깨닫고” 양심이 그것이 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 대속을 입어서 대속으로 말미암아 그 어두움을 벗고 사망에서 벗어나고 자존자를 바로 찾아서 올바른 이 관계를 척 가지고 보니까 과거에 것은 전부 다 주관적이요 사욕적이요 악령적이요 다 원죄적이요 본죄적이라. 이러기 때문에 이거는 다 죽었던 것이라 하여 그 양심이 하나님의 이 대속으로 살아난 것을 가리켜서 “양심의 약을 깨닫고” 이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양심의 악을 깨달아야 합니다. 양심이 다 자기 편이 된 양심은 다 악의 양심입니다. 자기 편이 된 양심은 악의 양심입니다. 돈의 편이 된 것은 돈의 종인 양심입니다. 세상 무슨 권세를 자기는 목표로 삼아서 권세 위주로 권세 목적으로 권세 중심으로 판단한다면 그 양심은 권세라는 화인을 맞아서 권세의 소유물이 됐다는 것입니다.

이래서 “양심의 악을 깨닫고” 고침을 받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몸을 맑은 물로 씻었다는 말은 영은 벌써 이 도를 받기 전에 영이 중생된 지 후에 당장 믿는 사람도 있지마는 오랜 후에 믿는 사람들이 대개 많습니다. 이래서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이 심신의 이 육을 가리켜서 몸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몸을 말해도 마음은 따라가고 마음을 말해도 몸은 따라가고 둘이 합해서 육입니다.

이래서 “몸을 맑은 물로 씻었다” 맑은 물로 씻었다 그말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씻었다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ㅡ저 ○○○교회에 미쟁이! 저 우리 미쟁이 말이요, 머리 들어 봐. 목사될 그런 소망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라. 그런데 미쟁이가 그 목사 하면 좀 조심해야 돼요. 미쟁이는 아무나따나 떡떡 들어붙이면 그만 되거든. 목수는 잘못해 놓으면 그거 참 고치지도 못하지마는 미쟁이는 그만 하나 더 붙이면 되고 이래 깎으면 돼. 이러니까 미쟁이 하는 데서는 구원 이루는 데에 그거 참 도움이 덜 돼요.

목수가 나아요, 목수가. 목수 그거는 잘못했으면 잘못한 흔적이 남아 있지마는 미장 그거는 흔적이 안 나와 있어. 붙이면 돼 버려. 인제 잠 깼어요? 잠이 깨졌어? 그래.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정확무오한 진리의 말씀으로 씻었으니 그러면 정확무오한 진리의 말씀은 우리를 깨끗게 할 수 있습니까? 못 합니다. 왜 그러면 이 물을 예수님의 공로로 해석하지 안하고 이것을 진리로 해석하는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우리에게 정확무오하게 효력있게 전달해 주고, 알려 주고, 믿게 하고, 바라보게 하고 힘입게 하는 것이 곧 정확무오한 진리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맑은 물로 씻었으니” 그말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정확무오하게 우리에게 효력있게 전하고 적응시키는 그 진리로 말미암아 우리는 대속을 온전히 입어서 깨끗해졌으니 하는 말입니다.

“씻었으니 이제는 참 마음과” 참 마음이라 말은 대속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참 마음이라 말은 대속받은 받은 마음을 말하는 것이니 이 참 마음이라 말은 거짓부리를 헤치고 헤쳐서 그 마음에, 마음에 주체를 말합니다. 마음에 주격체.

마음의 수지. 그 마음에 주인이 되는 마음의 중심 그것을 가리켜서 참 마음이라 이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는 진정이라고 이래 놨어, 진정.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진정으로 예배하는 진정이라는 것도 참 마음이라는 말과 같은 말이요 곧 마음의 주체라 말과 같은 말이요 곧 양심이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양심으로 섬겨야 되지 딴걸로 섬겨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하기를 “조상 때부터 맑은 양심으로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양심으로 섬겨야 그 섬김을 받지 양심으로 섬기지 않는 섬김은 하나님은 받지를 않습니다. 암만 섬겨도 양심으로 섬기지 않는 거는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다는 것을 아십시오. 양심으로 섬긴다는 것이 마음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참 마음이기 때문에 마음의 수지를 다 드렸으니까 찌끄러기 그까짓 거야 따라갈 것 아닙니까?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온전한 믿음으로” 이제 이 사실을 알고 인정하고 행하는 것으로 이제 해야 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예수님의 피공로를 힘입었기 때문에 이 공로가 있으니 이 공로를 입고 이 공로 입은 자이니 이 공로 입은 자로서 참 마음을 가지고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됩니다.

참 마음으로 나아간다 말은 착한 양심으로 나아간다는 말과 같은 말이요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간다 말은 확실히 똑똑히 정확히 알고 인정하고 그대로 실행하는 거, 바로 알고 실행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 그말입니다. 이게 아니면 하나님께 나아가지는 못합니다.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믿음으로 나아가야 되지 하나님 앞에는 뭐 강제로 나아갈 수 없고 억셈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고집으로 나아가고, 자기 기백으로 나아가고, 자기의 배짱으로 나아가고 하지마는 저는 지옥만 가지 못 갑니다. 하나님 앞에는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가야 하나님 앞에 갈 수 있습니다. 양심으로 하나님을 찾아가야 되지 양심 인도받지 않고는 하나님 찾아갈 자가 없는 것입니다.

“나아가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에게 신구약 성경은 다, 계약이라면 다 계약이요, 교훈이라면 교훈이요, 또 소망이라면 소망이요, 예언이라면 예언입니다. 이는 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맺어놓은 계약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그말은 우리에게 신구약 성경으로 약속하신 이 하나님은 변함이 없는, 미쁘다 말은 믿을 수 있다 말이요, 신용있다 말이요, 변함이 없다 말입니다. 이 계약에 대해서는 변동이 없습니다. 조그마치도 가감도 없고 변동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이 어떤 게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인가? 이 신구약에 있는 이 계약은 정확무오할 뿐만 아니라 이 예약에 대해서는 호리도 가감하지 못한다, 이 계약은 완전하다, 완전자가 선포해 놓은 계약이기 때문에 완전하다 하여 이 계약을 완전타 인정하는 것이 계약 선포하신 주님을 완전타 인정하는 것이요 이대로 실행하는 것이 완전타고 대우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지로 대우하는 것입니다.

“미쁘시니” “미쁘시니” 아주 믿을 수 있는 분이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믿는 소망, 우리가 신구약 성경에 약속된 것을 인정하고 확실히 믿습니다. 믿는 도리, 신구약 성경에 계약해 놓은 이것을 확실히 믿는 이 도리, 우리에 계약해 놓은 이 계약은 그 계약은 우리에게 소망 계약도 있지마는 우리가 걸어가는 길의 계약도 있습니다.

“네가 이래 걸어가면 내가 동행해 주고 이래 걸어가면 나는 너와 동행할 수가 없다. 이래 걸어가면 네가 사자구덩이 가도 내가 동행할 것이고 불 가운데 가도 동행할 것이고” 사자굴에 가는 데도 주님이 걸어가라고 하신 그 도리대로 걸어가니까, 그 길 이치대로 걸어가니까 주님이 같이 하시니 사자가 무슨 상관 있으며 주님이 같이 하시니까 불이 무슨 상관이 있으며 억울하고 애매하게 매장되고 모두 다 집중 사격을 받았지마는 그것이 요셉을 높이 들었고 성공하게만 했지 하나의 피해도 주지는 못했습니다. 믿습니까?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이 길로 걸어가면은 어데 가는가? 이 길로 걸어가면 어데 가는가?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 신구약 성경이 “네가 요렇게 말도 하고, 요렇게 생각도 가지고, 요렇게 마음도 가지고, 소원도 이런 소원은 가지고 그런 가지지 말고, 이런 기쁨은 가지고 그런 기쁨은 가지지 말고 이런 생활은 하고 네가 그런 생활 하지 말라고 요렇게 주님께서 졸졸 인도하시는 그 인도대로 가면은 우리에게 지극히 큰 소망이 이루어진다고 종착에 우리의 소망하는 복덩어리가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 덩어리가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주님의 인도대로 따라 걸어가면 “그리 그리 가면 영생이 이루어진다. 그리 그리 가면은 존귀가 이루어진다. 그리 그리 가면은 하늘과 땅의 것이 다 네것이 되어진다. 그리 그리 가면은 의인이 된다.

완전자가 된다.” 그거 우리 소망 아닙니까? 이 소망에 움직이지 말아라.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안하기 때문에 네가 주님 인도하시는 대로 요래 졸졸 따라가면 그대로 가면 종착되는 데에 큰 복덩어리가 있는 소망이 있으니 그 소망은 변치도 가감도 요동치 안하니까 네가 소망에 흔들리지 말아라 요거. 흔들리지 말아라.

소망에 흔들리지 말아라. 흔들리면 헛일입니다. 흔들리면 그 길을 못 가요. 이게 흔들리지 안해야 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소망에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굳게 잡아” 든든히 잡아, 어떤 환경 주위 형편이 몰아쳐 와도 길도 잊어버리면 안 되고 소망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알겠습니까? 길도 잊어버리면 안 되고 소망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거게 가면은 무서운 심판도 있고 하나님의 공심판도 있고 마귀떼도 있고 오만 거 다 있는데?’ ‘주님이 설정해 주신 사죄가 있기 때문에 어떤 죄뭉텅이가 와도 내게는 상관없다. 죄는 내게 상관 못한다. 어떤 세밀한 심판이 와도 하나님의 공심판 통과의 의가 있으니까 뭐 그런 거야 문제가 없다.  어떤 피조물이 다 달라들어도 능력의 보호를 입었으니 상관없다.’ “여러가지 시험 만나거들랑 참고 견뎌서 가만히 있거라” 잠시 잠깐 후면 승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습니다. 이제야 하나님이 나와 같이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보호가 여게도 따라온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내게 대해서 어데서나 순간도 찰나도 놓지 안하시고 장중에 잡고 계신다는 거 나는 하나님의 사랑의 품속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여.’ 하는 사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런고로 “굳게 잡아 서로” 인제 굳게 잡아, 할 일이 또 뭐이냐? 또 할 일이 나옵니다.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서로 돌아보아” 누구를 돌아보아? 믿는 사람을 서로 돌아보아, 자기 주위 환경에 하나님의 택한 자로 아직까지 도를 받지 못한 자 있으니까 그자들도 돌아보아 “서로 돌아보아” “서로 돌아보아” 돌아볼 게 뭐 있는가? 서로 돌아볼 게 있는가? 내 구원이 거게 있과 그 구원이 내게 있어. 몸에 여러 지체가 있는데 그 지체가 서로 돌아보지 안하면 안 돼.

눈을 위하는 것은 팔에 있고 눈을 위하는 것은 다리에 있고 눈을 위하는 것은 눈에는 없어. 눈을 위하는 것은 눈에는 없어. 눈을 위하는 건 눈에는 없어. 팔을 위하는 건 팔에는 없어.

이 오른팔 위하는 건 여기 손등어리에 여기 뭐 버짐이 났든지 그리 안 하면 가시가 찔려 가지고 있어도 이놈 빼지도 못하지 암만 이래 흔들어도 소용 없어.

이러니까 할 수 없이 왼손이 가 가지고 쏙 잡아빼 줘야 되지.

또 여기, 여게 뭐 뭐이 있는데 뭐이 아픈데 이걸 암만 뭐이 아픈지 암만 더듬어야 모르겠어. ‘이거 좀 봐 주십시오.’ 눈이 가서 딱 보니까 `가시 박혔구만.' 이러기 때문에 이거 한 몸에 여러 지체가 서로 도와서 사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한 몸이요 한 지체이기 때문에 내 구원이 거게 있고, 내 필요한 것이 거게 있고, 내게 유익될 것이 거게 있고, 나를 도울 것이 거게 있고, 나를 구원할 것이 거게 있고, 또 내게는 그를 돕고 그를 구원하고 그를 위할 것이 내게 있어.

이러기 때문에 이제 이 소망을 굳게 잡고 난 다음에 할 일은 뭐이냐? “서로 돌아보아” 서로 돌아봐라. 서로 피차에 돌아보라. 믿는 사람끼리 돌아보고 안 믿는 사람 돌아보고 이래서, 왜? 거게 뭐이 있기 때문에 돌아봐야 됩니까? 거게 뭐이 있기 때문에? 거게 뭐이 있기 때문에? 내 구원이 거게 있어. 내 필요한 것이 거게 있어.

나는 그 소리를 설교 못 들었는데 손양원 목사님이 ‘천국은 이렇습니다’ 하고서 숟가락을 커다란 걸 거석해 가지고 거기는 숟가락이 한 발 되는데 이래 가지고 어떤 욕심쟁이는 그 숟가락 가지고 자꾸 제 입에 넣을라 하니까 입에 넣을라고 떠넣다 보면 저 남의 입에만 들어가고 떠넣으면 남의 입에만 들어가고 이라니까 이거는 뭐 제 입에는 안 들어가니 항상 남 좋게만 하지 제게는 소용이 없어. 그런고로 제 욕심으로 제 중심으로 하는 것은 남이나 위하지 제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래서 ‘거게는 숟가락이 총이 길어서 서로 마주 보고 훅 떠 가지고 푹 떠먹이면 저 사람 받아먹고 저 사람이 또 훅 떠먹이면 나 먹고, 나는 저 사람이 떠먹이고 내가 저 사람 떠먹이고 이라는 것이 하늘나라다’ 참 손양원 목사님은 도리를 일찍 깊이 깨달았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분이 왜정 말년에도 감옥에 갔지마는 다른 종들과 달랐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한테 두지 안하고 구별해서 따로 뒀어. 따로 뒀어. 따로 뒀기 때문에 그 신앙에 경험 체험한 것도 아주 판이합니다. 그뒤에 나온 전기를 보면은 판이해. 참 더욱 더 은혜로와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사랑을 격려하며 선행을 격려해라, 격려해라 말은 뭐냐 하면은 그 사람에게 충격을 줘 가지고 열심을 내도록 하라 그말이오. 열심을 내도록 하라 그말은 격려를 말합니다. 열심을 내도록 하라.

사랑에 열심을 내도록 하라. 사랑에 열심내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을 잘 깨달아야 됩니다.

이 사랑이 제일 보배로운 동시에 해독이 제일 많은 것이 사랑입니다. 이십세기의 교회들을 썩히는 것은 다 사랑이 썩히고 있습니다.  “사랑은” 요한일서 몇장에 있습니까, 4장입니까? 4장 10절입니까? 4장 10절에 있어? “사랑은 여기 있으니” 했어. “사랑은 여기 있으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우리의 화목 제물로 주셨다” 이랬습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사랑은 사람에게는 없습니다. 왜? 사람에게는 있어야 속이는 사랑뿐이라. 왜? 사랑하지마는 사랑하니까, 사랑하니까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니까 아내는 남편을 태산같이 믿습니다. 태산같이 믿었는데 하루밤에 꼴꼴 하는데 꼬르륵 팩 그래 버리니까 이놈의 사랑하던 것이 그만 죽어버리니까 이거 기가 차요. 이러니까 사랑할 권리가 없어.

또 자기딴에는 아는 대로 이렇고 저렇고 모든 걸 설계하고 계획을 해 놨는데 뜻밖에 보니까 천지가 변해지고 모든 사물들이 변해지고 시세가 변해지고 모든 인심들이 변해지니까 완전히 변해져 버려. 이러니까 그 사랑함으로 계획해서 타일러 놓은 말이 다 거짓말이 되고 말아. 알겠습니까? 이해가 됩니까? 그러기 때문에 끝가지 사랑하는 자는 전지자라야 속이지 안하고 바로 지도할 수 있고 전능자라야 그것을 끝까지 책임지고 바로 알 수 있고 영원 불변해야 돼요.

이게 아니라도 사랑을 가질 수 있어요? 가질 수 있습니까? 이게 아닌 것이 사랑을 가지는 것은 다 속이는 것이요 속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여게 “사랑으로 격려해라” 그말은 이 사랑은 “사랑은 여게 있으니”, 요한일서 4장 10절에 “사랑은 여게 있으니” 그 이하에, 우리가 하나님 사랑하는 그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서 독생자를 보내 가지고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하나님과 화친시킨 이것이 사랑입니다. 알겠습니까? 그러니 사랑은 어떤 게 사랑이냐? 사랑은 우리에게 삐뚤어진 것을 다 청산 정리해서 삐뚤어진 것이 우리에게 없도록 해 주는 것이 하나의 사랑이요, 완전자와 완전한 친교를 맺어서 완전자와 결합되어서 내가 완전자에게 속해서 완전자가 나를 책임지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이게 사랑입니다. 알겠습니까? 이 사랑 헛됩니까 참됩니까? 참돼요, 참돼. 이래도 여러분들 거짓부리 사랑에 속지 말아요.

‘야, 오늘은 뭐 새벽기도 갈 게 아니라 비도 오고 날도 춥고 이라니까 오늘은 그만 둘이 거머앉고 누워자자.’ 사랑 같지요? 사랑 같지요? 사랑이 아니라.

사랑은 뭐이냐? 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과 하나님과 화친하게 하는 그게 사랑이라.

그라면 ‘아, 이라면 내가 하나님 앞에 죄짓지, 또 하나님과 멀어지지. 아이구 이거 사랑이 아니라 미움이로구만요. 여보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 하는 것이 성경대로 보니까 나를 미워하네요?’ ‘미워하기는 왜 미워해, 내가 사랑하는데?’ ‘나를 죄짓게 만들고 하나님과  멀게 하니까 미움이지 그게 사랑입니까?’ 요렇게 사랑을 배워 가지고 남편도 사랑하고 아내도 사랑하고 사랑을 받기도 하고 사랑을 주기도 해야 되지 이 세상에 제일 해독이 많은 독한 사랑 그걸 줘 가지고 나중에 가 튼튼히 믿었다가 ‘아이고, 나 죽겠다.’ 모두 이래 가지고 나중에 보면 죽는다고 야단지기는 거 모두 독 있는 사랑을 먹고 그 독에 취해서 지금 죽을라 해요, 독에 취해서. 다 그거 울고 불며 야단이라.

이래서 “사랑을 격려하라” 이는 어짜든지 피차에 죄를 범하지 안하도록, 죄를 미워하도록, 죄가 보기도 싫도록, 죄와 정이 떨어지도록, 죄와 멀어지도록, 죄와 원수가 되도록, 죄와 아무 관계 없는 사람이 되도록, 하나님과 밀접한 사람이 되도록 이 일을 너도 열심히 하고 그 사람도 열심히 충격받아 열심이 하도록 해라 그말입니다. 사랑에 격려하라 하는 그말이오.

이거 잘 배워야 되는데 이거 잘못 배우면 사랑을 격려하라 하니까 ‘봐라, 여기도 사랑을 격려하라고 하지 안했나? 열심히 뜨겁게 사랑하라고 하지 안했느냐?’ 이래 가지고 배암의 사랑을 갖다 붙이면 죽습니다.

배암의 사랑은 에덴동산에서 배암 만나고 난 다음에 하와가 아담 사랑하고 아담이 하와 사랑하는 그것이 배암 사랑인데 그 사랑은 쓰면 죽습니다. 쓰면 죽어요. 둘째 아담의 사랑은 딴 사랑이라. 이 사랑을 알아야 돼요.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이거 선행은 뭐이라요? 선행은 뭐이라요? 이 선이라는 정의를 얼마나 하나님이 바로 가르쳐 줬는지. 이것도 학자들은 주저주저 하고서 따라오지를 못합니다. 안 따라오면 속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열람해 보십시오.

“선행을 격려케 하라” 어짜든지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을 네가 만들도록 해라. 하나님 중심으로 살도록 그 사람에게 힘쓰도록 해라. 하나님 중심, 하나님 중심 하나님 위주로 사는 사람이 되도록 네가 이렇게 저렇게 감동도  주고, 충격도 주고, 또 힘쓰게도 이렇게 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만 돌볼 게 아니라 이제 다른 사람에게도 “서로 돌봐” 이래서 “격려케 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뭐 새벽기도 꼭 가야 구원 얻나? 밤예배 가야 구원 얻나? 대구집회 가야 구원 얻나?’ 잘난 너는 잘난 그 자리에서 실컷 잘나거라. 너 잘난 재미로 살아라.

너를 하나님 만들어 가지고 너 잘난 재미로 하나님 찬송 말고 너를 찬송해라.

너를 찬송해라. 온 가족들을 너를 따라오고 너 섬기라고 너를 우상을 만들어라.

실컷 좋도록 해라. 그 결과가 얼마나 좋은고 보자.

이래서 ‘뭐 꼭 교회 가야 되나? 꼭 새벽기도 가야 되나?’  “모이기를 폐하는” “모이기를 폐하는” 모이기를 자꾸 방해하는, 주의 이름으로 두세 사람 모였어도 그 가운데 계시는데, 자꾸 말세가 되면은 자꾸 모여야 됩니다.

기도하러도 모이고, 또 재독 들으러도 모이고, 성경공부 하러도 모이고, 새벽기도도 모이고 자꾸 모여야 돼요.

이라는데 요새 서부교회 교인은 그만 모이기를 싫어해. 모이기를 싫어해서 내가 한 일주일 어데 있다 왔더니마는 영 모이기를 싫어해. 아주 뭐 얼마 안 모이요.

새벽기도 얼마 모이지, ○○○집사? 보자 ○○○어데 있노? ○○○, 요새 새벽기도 얼마 모인다고 보고하노?  얼마고? 여반만 하나? 여반만 얼마야? 삼백구십에서 사백 명? 삼백오십 명에서 뭐 사백 명 그거라. 안 모이요. 그전에는 천 명 이상이 모였는데 이제 좀 모이라 하면 모이고 모이라 소리 안 하면 자꾸 내리빵수로 내려가.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모이기를 폐하는 자는 자꾸 모이지 안하는 그것만 자꾸 연습합니다. 자꾸 교회 안 모이는 연습만 하요. 안 모이는 연습만 해. 연습만 말고, 여러분들 처녀들 많은데, 처녀들 많은데 자, 신랑을 구할 때에 새벽기도 못 나오게 하는 신랑 구할라요 새벽기도 가자고 하는 신랑 구할라요? 어떤 신랑? 못 나오게 하는 신랑 구할 사람 손 들어 봐. 그것만 보면 못 나오게 하는 신랑이 안 됐는 거 같지. 이마빼기도 빤들빤들하고, 문필도 좋고, 직장도 좋고, 이름도 있고, 실력도 있거든.

그러니까 ‘새벽기도 나가는 것만 봐서는 저  총각한테 가면 좋겠는데 이 면을 보니까 이게 좋다.’ 이래 가지고 진주와 보화를 발견하지 못한 처녀는 절대로 신앙 보고 가지 않습니다.

내가 어제 ‘믿음 부자한테 시집가거라’ 했더니마는 그 처녀가 마음에 이거 참 우리 아버지한테까지 말해 놨으니 믿음 부자만 자꾸 택할 날이면 이 시집갈 일이 낭파다 싶어 그런지 낯이 뻘거이 해 가지고 감사와 기쁨이 충만치 안한 것 같애.

내 말이 복비는 말이야, 복비는 말.

그래, 그라면 만날 새벽기도도 같이 가고, 산기도도 같이 가고, 집회도 같이 가고, 주일도 같이 가고, 심방 전도도 같이 가고 하는 그 신랑한테 그 총각한테 시집갈라요 평생 다른 데 놀러나 같이 가자 하지 하나님 앞에 가는 데는 같이 한번도 안 가는 그런 사람한테 시집갈라요, 어떤 데 갈 거라? 요거 좀 평가를 해 봐요. 알겠어? ○○○집사님은 자꾸 돌아다니지, 같이 다니지? 새벽기도 같이 나와요? 주일날 같이 나와요? 주일날 엉뚱이같이 놀러가자 소리나 자꾸 하지. 아이고, 모두 뒤퉁이야, 뒤퉁이. 계산이 틀렸어. 여러분들 정신차려야 돼. 이만해도 처녀들 복있는 길 환하게 다 가르쳐 줬는데.

신랑들도 총각들도 그래. 자기에게 믿음에 도움을 주고 내가 믿음히 흐려질 때에 뒤에서 돕고 참 믿음에 돕는 배필이 돼야 될 터인데 믿음에 돕는 배필은 원치 안하고 진액{이}만 빼먹을 것, ‘실컷 바가지 긁어도 좋다, 진액 빼도 좋다, 전부 다 긁어 바쳐도 그래도 좋다,’ 이렇게 기생충만 좋다고 빤들빤들한 거 찾아 돌아다녀. ○○이 너는 어떤 데 갈 거라? 믿음 보고 가겠어? 저 뭐 ○선생 요새 잘 결혼한다 하는데 나는 거게 몰라요, 나는. 어떤 데인지? 주일학교 반사 하나? 반사 해? 반사 몇등 해? 삼등 못 가? 함부래 뒤에 가서 철거리 함부래 얻을라고 하지 마라. 신앙 생활에서 못 견뎌 뒤에 철거리가 돼 가지고 뒤를 자꾸 쭉쭉 당기고 애먹이는 거 그거 큰일 난다.

여기 아마 그 처녀 와 있을 거라. 내가 철거리 될 상바르면 내가 못 하구로 해요.

주일학교 삼등 못 하는데 이등 안 되면 내가 그 혼사에 방해할 거라. 이등하기 전에는 안 돼. 결혼 못 한다. 네가 목사 할 사람이 선배 목사 시키는 대로 안 하면 목사 안 돼. 이등 안 되면 결혼 못 한다. 안 하겠어? (예!) 인제, 이러구로 우리 주일학교를 부흥을 시키요. 온 전정신이 자꾸 이라니까 자꾸 부흥이 되거든.

그래야 돼요. 우리 인간 구원 그거 외에 딴거 가치 있는 거 뭐 있습니까? 여기 이래 놓으니까 이 큰 부흥돼, 지금. 이래 놓으니 ‘백 목사님은 주일학교 반사 그 일등 이등 그것으로써 전부 가치를 그만 다 본다.’ 그게 가치 다라.

사람이 안 되면 사람이 안 따라와요. 안 됩니다. 사람이 돼야 사람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만 그것 되면 다 돼.

이러니까 ‘아이구, 이거 반사 좀 힘을 써야 되겠다.’ 이래 놨으면 이 말 한마디 해 가지고 우리 반사 남녀 반사, 처녀 반사 총각 반사들이 열심히 주일학교 반사노릇 한다 하면은 ‘백 목사, 네가 참, 네가 못나기는 못났지마는 나 좋은 소리 잘해. 내가 좋아하는 소리 잘해. 그러니까 내가 너를 좋아하지.’ 이럴 거라.

안 그렇겠어요? 자꾸 이런 소리만 하면 주님이 나 좋아하겠소 안 좋아하겠소? 좋아하지요. 여러분들도 다 그래 해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모이기를 폐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러나 “모이기를 폐하지 말고” 그 따라서 ‘그만 오늘 새벽기도 가지 말자. 에, 오늘일랑 그만 자자. 오늘은 수요일날 밤에 가지 말자.’ 이라면 뭐라고 해요? 그자에게 대해서는 뭐라고 하라 했어요? 여게? “오직 권하여”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더 모이라” 이랬습니다.

이라니까 새벽기도 나오자 하면 안 나오니까 일찍부터 앉아 가지고 자꾸 이래 쌓으면 이 멍충이 모양으로 이제 또 새벽기도 가자 한다 싶어서 누워 가지고 코도 곯며 크흐 크흐 그래 하면서 이래 떡 깊이 잠든듯이 이래 쌓으니 괜히 겁이 나서 옆에서 기도하다가 또 어째 볼꼬 망설거리다가 자꾸 이래 쌓다가, 어떤 분은 그래, 내가 보니까. 그라다가 그만 설설 다리를 주문대요. 다리를 주물라 가지고 자꾸 이래 주물러서 안마를 해 주면 나중에 가 실컷 시원하게 안마해 주고 나면 ‘에, 참. 그만 말아. 갈께.’ 그래 가지고 와 가지고 여게 장로 만든 사람 하나 있어요. ○○○장로님 어데 있어요? 얼마나 농땡이라고. 이런데 인제 그만 장로가 됐어. 이래야 되지 그리 안 하면 안 됩니다.

내가 말 들었는데 건축연보 하자 하는데 그때 살림살이 톨톨 다 털면 한 사백만원 되는데 건축연보를 삼백만 원 하자 하니까 안 한다고 이래서 그래 하도 기가 차서 그만 그래 가지고, 그때는 거지라. 그러니까 사백만 원 다 털어서 해도 될똥말똥한데.

자다가, 그만 하도 답답해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된다고 그래 살며시 나가 가지고 대문간 위 옥상에 올라갔어. 옥상에 올라가서 거기 가서 기도하고 있었다 말이오.

거기 가서 기도하고 있으니까 자다가 보니까 마누리가 없어. 이거 기가 차는 거라. 그리 양사방 찾아서 돌아다니며 이래 돌아다녀도 없는데 이거 양사방 찾아 돌아다니니까 ‘이거 내가 연보 하자 하는 거 연보할 걸. 그만 그래 놓으니까 아마 마음이 상해서 지금 어디로 나갔는가배. 이거 예배당으로 갔나 어데 갔노?’ 지금 가슴이 도근도근한데 그래 나중에 어째 보니까 대문 옥상에 있더래요.

그래 ‘누고?’ 하니까, 자꾸 그라며 기도하고 있거든, 눈물 흘리며 기도하고 있거든. 그래 있다가 ‘가자, 가자, 가자. 내가 할께, 할께, 할께.’ 그래 가지고 다 바쳤어. 이렇게 안 하면 안 돼요. 여러분들에게 좋은 모략을 내가 주는 거라, 신앙 모략을.

그러기 때문에 아무 가정이든지 제일 처음에는 아내가 앞서 가지고 신앙 생활 시작합니다. 언제든지 아내가 앞서 가지고 하면은 그 가정이 아직까지 온전한 가정은 못 됐습니다. 시작은 아내가 먼저 해 가지고 나중에는 이제 남편을 신앙으로 돌이켜 놓으면 늦게 나서도 달아나면 부르도자 모양을 막 뿍뿍 잘 달아납니다. 이래 놓으니까 그다음에는 이제 그 남편이 신앙을 지도하는 앞선 사람이 됩니다. 앞선 사람이 돼. 그러면 그 가정은 그때사 신앙이 바로 되는 것이라. 대개는 그러합니다.

그러나 남편이 앞서 가지고 달아나는 그 가정은 그 부인이 평생 뒤에 철거리 노릇을 해 가지고 애를 먹입니다. 하나님이 함부래 그래 딱 예정해 놨거든.

그거는 남편이 아내가 철거리 노릇해야 많은 양떼들이 철거리 노릇할 때에 끌고 쭉쭉 달아나갈 수 있는 그런 실력을 배양시키기 위해서 그런 거라, 실력을 배양시키기 위해서.

이러니까 아내 철거리 농땡이 만난 사람은 그 사람은 교인 농땡이 문제 없습니다.

우리 손양원 목사님의 사모님이 뚱뚱하이 참 농땡이입니다. 이런데 뭐 하도 농땡이 거석하니까 그만 거석하면 ‘어라 내가 하나님의 딸한테 내가 벌로 잘못했지.’ 그만 쌀 마른쌀 한 주먹 그만 수건에 싸 짊어지고,  한 주먹 싸 들고서 그만 산으로 가서, 산으로 가서 뭐 열흘도 보름도 있으니까, 그라고 나면은 ‘아이고, 내가 농땡이 부려서 이 남편이 그만 어데 가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세.’ 이라면 조금 마음이 돌이켜 가지고 ‘내가 오면 안 그래야 되겠다’ 이래 오면, 와 가지고 저는 또 대뜸 또 가 가지고 ‘내가 이렇게 그만 기도하러 나온다 해 놔서 이거 또 얼마나 울고 얼마나 지금 걱정을 하고 얼마나 회개를 하겠노?’ 그 회개를 누가 많이 하겠어? 손 목사님이 회개를 많이 해요.

많이 하니까 아내도 하지마는 오거든 회개해도 자기는 한 두 개나 회개하고 여기는 한 세 개나 회개했으면 될 터인데 자기는 열 개나 회개하는데 여기는 한 개만 회개했거든. 만날 철거리 된다 말이오.

이래도 와 놓으면 또 ‘아이고, 이거 한 개를 회개했다.’ 좋아서 못 견뎌서 날뛰어 쌓아니까 그 아내 보기에 ‘아이고, 남자도 가볍고 중량도 없고 똑 대롱에 팥 넣어 놓은 거 모양으로 출랑거리기만 하고.’ 왜? 그 사람들의 인격은 띵하고 미련부리고 배짱부리는 게 인격이거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인자하고 긍휼하고 이렇게 남에게 조금도 부담을 주지 안하고 어짜든지 남을 기쁘게 영화롭게 하는 것이 인격이라 말이오. 이러니 정 핀트가 안 맞아 놓으니까 이거 문제가 되는 거라.

어짜든지 아내가 앞섰든지, 아내가 앞서면 목표는 남편이 앞서기까지가 목표고 또 남편이 앞서면 자기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끌고 나갈 수 있는 실력이 있는 사람되고 나면 실력 다 기르고 나면은 그 아내가 굽신굽신 합니다. 이제 자기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다 끌고 나갈 수 있는 그만한 실력을 기르고 나면은 자라고 나면은 그다음에 그 아내 뭐 이용할 필요가 없는데, 뭐. 하나님이 철거리로 이용할 필요가 있어야지, 그 남편이 실력 다 길렀으니까. 이라니까 그 아내가 철거리 노릇 안 해요, 그만. 그다음부터는 철거리 노릇 안 하고 고분고분하이 잘 합니다.

 

26절, 성경을 봐요, 26절, “우리가 진리를” “우리가 진리를” “진리를” 우리가 예수 믿는 이치를 말이요, 예수님을 바로 믿는 이치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에” 예수님을 바로 믿는 이치를 안 후에 말이요, 안 후에. 오늘 뭣 배웠지요? 우리는 누구의 것이라요? 우리의 것은 뭐라요? 몇 가지? 열한 가지. 나는 주님의 것. 똑똑히 배웠어요.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진리가 뭐인데? 예수님의 대속을 바로 아는 그 이치를 우리가 배웠어. 그게 진리라. 그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우리가 알고 난 다음에 죄를 지으면, ‘이거는 죄다’ 하는 것을 알고 난 다음에, 예수님의 대속을 입었으니 어떻게 살아야 된다는 걸 알고 난 다음에, 요것은 죄라는 것을 알고 난 다음에 죄를 짓는 것은 짐짓 짓는 거라. 짐짓 죄를 짓는 것.

그 죄는 예수님이 사하셨는데 예수님이 사하신 것은 그것은 근본적으로 다 이래 사하셨는데 자기가 다시 범죄하면 사하는 길이 없어. 속죄하는 제사가 없어.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사죄 못한다 말이오. 그러면 그거는 어떻게 해요? 이제는 고쳐야 돼요. 예수님의 대속을 입은 사람으로 살아야 돼요. 살기 전에는 안 돼. 말만 해 가지고 안 돼. 처음에는 말만 하면 되는데 그다음에는 말만 해 가지고는 안 돼요. 요거 알아야 됩니다. 말만 해 가지고는 안됩니다.

‘또 죄짓고 고하면 사함받는다. 죄짓고 고하면 사함받는다.’ 이라는 자에게 대해서 하나님께서 심히 분하게 여기요. 저 ○선생, 눈이 가물가물하다. 내가 우리 반사들 많이 알아요. 일등 반사들은 다 아는데, 일등 반사들 예배 볼 때도 나한테 있으면 애를 먹어요. 자꾸 이름을 불러 가지고 우사도 시키지 자꾸 이래 쌓아서.

“죄를 속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회개 안 하면 심판 받아요. 예수님의 피공로가 소용 없어. 다시는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고 하지 안했어요? 회개 안 하면 거게는 하는 길이 없어요. 이런데 ‘뭐 예수님의 피공로 있으면 다 되지 않느냐?’ 그 어리석은 그런 아주 범벅신앙 그런  무질서 무정확한 그런 신앙 가지면 안 됩니다.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대적하는 자가 누군데? 주님의 대속을 입은 자가 대속을 벗고 살고 이제 죄를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의를 하기 위해서 이렇게 큰 힘 들여서 대속해 놨는데 여전히 알고도 죄를 뿍뿍 짓는 자가 그자가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지 누가 예수님 대적하는 자요? 순종하지 않는 자는 대적하는 자입니다. 순종하지 않는 자는 대적하는 자요.

대적하지 않는 자는 순종하는 자요. 예수님이 그렇게 가르쳐 놨어.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제가 알고 짓는 죄, 짐짓 짓는 죄 그죄는 회개하지 안하면 심판과 하나님이 대적을 소멸시키는 맹렬한 불만 있다 했습니다.

이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그 죄를 지어도 예수의 피만 믿으면 아무 상관없고 구원이 돼요? 구원이 돼요? 구원이 됩니까? 아레 저게서 말한 분, 과거에 그렇게 안 것이 얼마나 잘못 알았습니까? 대답해 봐요. 거기 없나, 갔나? 갔어? 갔어? 도망뺐는가배. 와 보니까 별스럽게 예수 믿으라 하거든. 그래도 이렇게 믿는 게 옳애! 그래 믿으면 멸망이야! 잘못 배우고 잘못 가르쳤어. 이것도 성경이야.

“오직”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에”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이거 택자에게 말했소 불택자에게 말했어요? 택자에게 말했어. 달리 아무리 변론할라 해도 할 길이 없어.

그다음에 덧붙였습니다.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모세의 법을 범한 자도 말이요, 폐했다 말은 범했다 말이오. “범한 자도” ‘모세의 법을 무시했기 때문에 그렇지 무시하지 안하고 잘못해서 범한 것 말한 것 아니다. 모세의 율법을 무시한 자를 말한다.’ 아니, 범한 자를 말한 거라, 요게. 그렇게 마귀란 놈이 요리 조리 꾀우는 데에 불거지면 안 돼요.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이 사람이 모세 법을 어겼다, 모세 법을 어겼다.’ 하는, 한 사람 증인 가지고는 안 되고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인이 있으면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대속하신 주님의 공로를 멸시하니까 주님을 멸시하는 것 아닙니까? “아들을 밟고” 예수님의 대속을 무시한다 말이요, 멸시한다 말이요, 예사롭게 생각한다 말이오.

하나님의 아들을 밟는다 말은 예수님의 대속에 주님은 죽으심으로 했지만, 죽어야, 아이들 말로 뭐 죽었다 해도 이웃 사람 죽은 것 하나만치도 여기지 안하는 것이니까 예수님을 짓밟는 거라, 그게. 어떤 분인데?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이랬으니까 택한 자라 하는 것이 여기 분명하지 않습니까? “자기를 거룩케 한 언약의 피를 언약의 피를”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너희는 생각하라” 이것은 읽기도 싫어합니다.

어짜든지 죄짓는 인간들 좋게만 말해 주고 ‘아무래도 구원 얻는다’ 이렇게만 말해 주고, 세상에 ‘천국에 가면 구원에 차이가 있다.' 이것도 말했다고 이단이라고 야단이라. ‘천국 가면 구원에 차이 있다니? 세상에, 천국에 차이 어데 있노? 세상에도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시비가 나고 다 불평이 있는 건데 천국도 차이 있으면 거기도 뭐 시비 있으라고?’ 차이는 있어도 시비는 없습니다. 왜? 차이 있는 것을 제가 똑똑히 알기 때문에 ‘주여, 나는 이렇게 차이를 받아야 됩니다.’ 정확하니까 시비가 없지.

세상에서는 그것이 아무리 검은 놈이 희다 해도 흰 놈이 검다 해도 그걸 똑똑히 모르고 정확성이 드러나지 안 하니까 그런 거짓부리가 거기서 용납되지마는 하늘나라는 광명의 나라기 때문에 그런 것이 용납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이 피가 우리를 맑갛게 깨끗게 씻었으니, 이 피가 씻었으니 다시는 더럽히지 안해야 된다는 것을 깨닫지 안하고 ‘주님의 피로 뭐 사했으면’ 사했다는 것도 그렇게 깨끗한 감을 느끼지 안하기 때문에 또 더럽혀지는 것도 그렇게 더럽혀지는 것을 느끼지 안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부정한 것으로.

깨끗한 감을 느끼지 못한 자는, 깨끗한 감을 느끼지 못하는 자는 잘 더럽히고, ‘더럽히나 깨끗함이나 꼭 같은데 뭐?’ 이것이 부정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요 해석을 바로 알아야 돼요.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 “은혜의” 우리에게 모든 것을 공짜배기로 갖다 줄라고 믿기만 하면 공짜배기로 줄라고 하는데 하거나 말거나 암만 귀에 대고 아무리 말해도 죽자껏 해 가지고 ‘이 지혜와 능력이 어데서 왔노?’ 깨닫도록 하니까 실컷 돌아가서 ‘저거 누이동생과 어머니는 마리아 아니가?' 하면서 휘떡 집어던져 버려. 이것이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

성령이 ‘야야 이렇다 이렇다. 이래라.’ 실컷 깨닫게 하고 나니까 식은 죽먹듯이 싹 소멸해 버려. 성신의 감화, ‘백지 내 마음에 그런 생각이 들었지.’ 성신의 감화가 제가 왔던 것을 소멸하고, 어떤 사람은 자기 마음 가운데 성신의 감화가 왔으면 세상에 다른 것이 어떻게 해도 그걸 변동을 못 합니다. 변동을 못 해. ‘하나님이 내게 오셔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내가 어떻게 이것을 변동하겠노?’ 자기가 하나님 앞에 한번 말한 것 한번 깨달아 느낀 것을 그것을 저 혼자, 혼자의 군담한 것으로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왜? 그 좋은 것이 저 혼자는 그런 군담이 안 나와.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이 얼마든지 알도록 하기 위해서 힘써 가지고 그런 깨달음과 그런 생각이 나온 것이지 아무나따나 저절로 장난삼아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라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성신의 감화를 소멸하는 것이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이것이 우리 건설구원, 기본구원 얻은 자의 신앙 행위에 관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낙관하고 그라면 안 됩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무슨 원수? 안 믿는 사람? 이 원수는 그 피로 자기를 깨끗게 함을 입는 그 사람을 대해서 원수로 말합니다. 원수.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대해서 사랑도 뜨거운 동시에 하다가 하다가 안 되니까 미움이 뜨거워졌습니다. 성경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주께서 그 백성을’ 또 이거 뭐 불신자로 자꾸 끌어다 붙여서 자꾸 이래 자꾸 책임을 전가시키고 피해보면 저만 망하지 어데까지 피할 것입니까? “우리가 아노니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하나님의 손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손을 암만 벗어날라 해야 벗어나지 못해. 다 뽈끈뽈끈 붙잡혀. 의를 행한자도 절대 하나님이 빠주지 안하고 죄를 지은 자도 절대 빠주지 않습니다. 사람을 하나님이 빠주는 줄 압니까? 혹 총망 중에 잊어버리는 줄 압니까? 어리석어. 하나님은 전지자라. 풀 한 포기에도 하나님은 그 세포가 수가 없어. 그 세포는 수천이요 수만이라. 이렇게 세밀하신 분이라.

사람의 손가락 하나 만드는데 여기 생명이 세포가 뭐 나는 똑똑히 모르지만 아마 몇천이 있을 거라. 그런데 그것마다 다 개체가 생명 다 가지고 있어요. 코도 있고 눈도 있고 입도 있고 다 있어. ‘또 저 말쟁이 말하네.’ 네가 몰라 그렇지, 네가 현미경으로 봐도 몰라 그렇지 그것도 눈도 있고, 입도 있고, 수족도 있고 다 있다.

또 그것도 그래도 감각도 다 있다. 그것도 그 개인과 같은 개체로 되어 있는 것이 종합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은 종합체라, 어떤 철학자가 그걸 좀 궁구하고 난 다음에 ‘적은 우주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32절에, “전날에 너희가” 처음에 예수 믿을 때에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빛을 받다니? 예수 믿는 열한 가지 구속의 도리를 받은 후에, 깨달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처음에 예수 믿을 때에 오만 어려움이 있었지마는 다 참고 싸웠어.

자, 여게서 보자. 예수 믿을 때 누가 여기 있노? 이런 사람들은 다 별로이 고난 안 받았어. 처음에는 전도를 부인들이 끌어와요. 부인들이 처음 믿어 가지고 그래 가지고 나중에 남편들 믿어요. 이러니까 고난은 남편들은 이제 사회 고난 받고 부인들은 가정 고난 받아.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자, 예수 믿으면서 뚜드려 맞은 사람 손 들어 봐. ○권사 뚜드려 맞았어, 예수 믿는다고? 안 뚜드려 맞았어? 대답을 얼른 해. 안 뚜드려 맞았으면 안 뚜드려 맞았다고. 어? 안 뚜드려 맞았으면 안 뚜드려 맞았다고 대답해. 안 맞았어요? 가짜로구만. 또? ○집사, 맞았어? 안 맞았어? 모두 가짜로구만. 요 밑에 ○집사는? 안 맞았어. 모두 가짜라. 그래 놓으니까 예수를 더럽게 믿어. 그래 놓으니까 예수를 더럽게 믿어.

여기 다 그럴 건데. 저 ○○○교회에 저 집사님 뚜드려 맞아봤어요? 안 맞았어? 안 맞아봤어? 안 맞아봤어, 남편한테 안 맞아봤어? 안 맞아봤어? 순 가짜라. 이래 놓으니까 예수 믿을 맛이 없어. 에이고, 복 없다. 왜? 예수를 더럽게 믿었기 때문에 안 맞았어. 예수를 바로 믿어보지. 마구 밥상이 날아가고 막 옆에라도 갈빗대를 뿌지르고 안 그라는가? 여기 갈빗대 뿌질라진 사람 왔는가 몰라? 그렇츰 그러나? 이거 참 희귀하네. 여기, 그거 참 그래? 저 ○집사 사모님, 맞아봤어? 안 맞아봤어? 모두 거짓말쟁이로구만. 안 맞았어? 안 맞았어? 모두 거짓말쟁이라, 보니까. ○○○목사님, 어데 있어? 예수 믿는다고 때려본 일 없어? 누가 먼저 믿었어? 믿어 가지고 결혼했으니까 그렇구나. 참, 여게 ○○○, 저 개명교회 ○○○집사 어데 있어요? 손 들어 봐. 어데 있어? 뚜드려 맞아봤어? 거기도 안 맞았어? 거기는 내가 알아. 맞아서 온 방에 피가 흥건해, 뭐. 얼마나 맞았는지. 그래 맞기를 몇 번이나 맞았는지 수 헤아려 봐요? 아마도 맞기를 스무 번 이상은 맞았을 터인데. 스무 번 이상 맞았어.

자기 예수 믿는다고 길쌈해 놓은 거 옷이고 뭐이고 전부 마당 가운데 이만치 거름무더기 재어놓고 불 질러놓고 아무도 모르게 싹 다 태웠지, 그라고 새벽기도 나간다고 인제 문을 양쪽문을 뽈끈 이렇게 막, 그때는 자물쇠가 별로 없거든. 뭐 이래 참바로 댕여 놓고 이래 자니까 잠만 한숨 자면 잠들 때 돼 살며시 끌르고 예배당에 새벽기도, 밤에 와 철야해, 못 나갈 터이니까.

이라니까 깨는 걸, 그 나가는 걸 모르니까 자기 장골 다리하고, 힘이 셉니다.

나하고 동갑이라. 힘이 센데 참바로 가지고 자기 다리하고 둘을 뚤뚤 이래 뭉쳐 놨어. 이래 뭉쳐놓고 이라면 뭐 끌르면 알 것이니까. 이래도 살살 끌러 가지고 그래 새벽기도 나와. 그래 한번도 새벽 빼지 않아. 빼지 안했어.

이라니까 그 남편 예수 믿도록 하기 위해서 그저 밤이면 저게 화산날망인가 하는데 거기 어두운 데입니다. 아주 높은 산이고 짐승도 다니는 곳인데 거게 가 가지고 제단을 쌓아서 거게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내려와서 또 예배보고 예배드리고 또 집에 가 살림살고, 그라는데, 한번은 비가 오고 하도 어두워서 ‘주님 내가 도무지 지척을 분별 못하고 어데인지를 모르겠습니다’ 하니까 빛이 환하게 비추더니마는 기도하는 그 자리에 가니까 딱 끊어지더래요. 거기서 인제 기도하고, 그뒤에 또 한번 내려올라 하니까 시간은 곧 돼 가는 것 같은데 어데인지 몰라 어데 뭐 떨어지면 죽을 것이고 그뭐 바위 들성이 높은 곳이고 아주 빼쪽한 곳이라. 이래서 또 할 수 없어 하나님 앞에 기도했더래요. ‘어두워서 내가 도무지 못 가겠으니까 주님 좀 밝게 해 줄 수 없습니까?’ 하니까 빛을 환하게 비추어서 대낮같이 환하게 와 가지고 예배당에 딱 들어오니까 빛이 딱 꺼지더라는구만. 그랬지? 내가 거짓말해요 참말이요? 참말이면 손 들어. 그래 참말이야, 참말. 나 거짓말 안 해요, 다 들은 말 하지.

이렇게 여러분들, “고난의 큰 싸움을 참은 것을 생각하라” 가정에서 고난 받은 사람, 사회에서 고난 받은 사람, 국가에서 고난 받은 사람, 사업에서 고난 받은 사람, 고난의 종류는 수없이 많은데 예수님 믿어서 예수님 때문에 교리 신조 때문에 고난받아 보지 못한 사람은 아직까지 미나리로 말하면 마디가 생기지 안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언제 떨어질란지 모릅니다, 미안하지마는. 예수 믿는 도를 인해서 고난 받지 안한 사람은 그거는 하룻비둘기기 때문에 언제 떨어질지 몰라.

○○이 너는 고난받아봤어? 안 받았어? 일선에 가서 봤아봤어? 일선에 가서 받아봤어. 어데든지 예수를 바로 믿을라 하면 고난 받습니다. 군에 간 사람들 예수 바로 믿을라면 다 그저 뭐 떡이 되구로 뚜드려 맞습니다. 이래도 나중에 신앙 자유하게 돼. 그래 가지고 모두 신앙 자유했어. 맞아도 신앙 자유해.

○○○이, 주일 지키기 위해서 몽둥이 맞아봤어? ○○이 아니가? 주일 지키기 위해서 몽둥이 맞아봤어? ○○○ 아니가 이거? 너 이름이 뭐꼬? 그래.

○○○이가? ○○○선생, 주일 지키기 위해서 몽둥이 맞아봤어? 수요일날 볼라 하다가 뚜드려 맞아봤어? 그 예배 봤어 못 봤어? 뚜드려 맞고? 뚜드려 맞고 못 봤어? 그만 뚜드려 맞고 난 다음에 ‘예, 안 보겠습니다.’ 그랬나, 못 나가게 해서.

저 ○○목사 국기에 대해서 경례 안 하고 이 받들어 총, 이 받들어 총 하는 그것도 경례라고 받들어 총 안 할라 하다가 되게 뚜드려 맞은 모양이지? 되게 맞았지? 그 맞아 가지고 그때 입원됐어 그냥 있었어? 뚜드려 맞았는데 여러번 맞았는데 내가 물어봤어? ‘얼마나 맞았노, 주를 위해 얼마나 맞았노?’ `아닙니다. 맞고 나서 생각하면 다른 일 때문에 맞았지 주를 위해서 맞은 거는 똑 간단하게 한 번밖에는 맞은 일이 없습니다.’ 이래. 다 주를 위해 맞은 거는 세밀히 분석하면 주를 위해 맞은 거는 아니고 전부 제 잘못해 가지고 맞은 게 많아요.

주님을 위한 고난이 얼마나 어려운 줄 압니까? 주님을 위해서 고난당한 그 고난이 그렇게 쉽게 오는 줄 알아요? 아니오. 하늘나라 가 보십시오. 나는 예수 때문에 고생 고생 했지마는 가 보면 전부 제가 잘못해서 고생했지 주님 때문에 고생받은 것이라면 그는 참으로 천지를 주고도 바꾸지 못할 만한 보배지마는 그런 일이 적어.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빛을 받아서 진리를 받아 옳은 사람으로 옳은 생활 예수님의 대속을 받은 자로서의 흠없는 합당한 생활을 할라고 하면은 모든 전부가 세상은 적이요 어두움이기 때문에 대립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신앙 생활로 인해서 “고난의 큰 싸움을 참은 것을 생각하라” 우리는 과거에 고난의 큰 싸운 것을 언제든지 생각해야 됩니다. ‘과거에 내가 이런 고난에서도 주님이 나를 구원하셨다. 이런 어려움에서도 나를 구원하셨다. 이렇게 절망 가운데서 나를 구원하셨다. 이렇게 고독할 때도 나를 구원하셨다. 이렇게 첩첩 원수 속에서도 나를 구원하셨다.’ 저도 그런 것 많아요. 그런 것 많은데 하나는 금족령을 내려서, 그때는 금족령을 나라서 토벌하기 위해서 내렸으니까 전부 사람들이 집을 뜯어 땠어요, 나가지 못하니까. 겨울이니까. 집을 다 뜯어 땠어. 아무리 좋은 집이라도 얼어 죽을 지경이니까 집을 전부 뜯어 가지고 한쪽머리를 때고 하는 그런 때인데 그때에 나는 사근 거게 사경회를 약속했다고 약속한 걸 지켜야 된다고, 하나님 앞에 약속한 걸 지켜야 된다고서 나가니까 군인 차가, 그때에 군인들밖에는 못 가는데 군인 차가 있어. ‘나 저 함양 갈랍니다. 좀 타고 갑시다.’ ‘예, 타시오.' 이래.

하나님의 경영이 있어 타라 했어. 탔다 말이오.

타니까, 함양 가니까 사람도 하나도 없지, 나는 거게 뭐 신문기자도 있고 뭐 어짜고 하기 때문에 어북 그것들이 큰소리 해 쌓아서 뭐 큰소리 하면 뭐이 될 줄 알고 거게를 찾아갔다 말이요, 아무도 못 가는데 찾아갔어. 찾아가니까 ‘아이고, 지금 보이소, 우리 집 뜯어 때는 것 보이소. 지금 뭐 옆에도 못 가고 이웃집도 못 가고 이라는 판인데 어데 사근을 간다 말입니까? 못 갑니다.’ ‘너 그때 뭐 큰소리 해 쌓더니만 그 빽이 없나? 좀 갈 수 없나?’ ‘아이구 뭐 경찰 이 사람들 꼼짝도 못 합니다. 군인들 판이라 지금 모두 군인들한테 꼼짝도 못 합니다.’ 에라 이거 뭐 하자고 해서 그래 그만 나섰어.

나서니까 그 초에서는, 초막에서는 사람만 보이면 무조건 쏘기로 결의했기 때문에 그래 가지고 사람들을 금족령을 내려서 문 밖에 나가면 다 쏴 죽어. 그러기 때문에 문 밖에 나가는 사람들 다 쏘여 죽었어. 이러니까 사람이 하나도 출입 없어.

그래 갔어. 가니까, 총을 딱 대면서 ‘여기가 어데라고 와? 어째 왔어?’ `아, 나는 저게서 보내서 왔지. 거게서 못 가구로 하는 걸 내가 뭐 날아왔을까?’ 또 통과 통과 이래 가지고 사근교회 가니까, 추 목사님 계신 데 가니까 ‘아이구 이거 참, 이거 지금 우리 새벽예배를 못 봅니다. 전부 앞집에도 뒷집에도 아무도 오지 못하고 도무지 출입을 못 하는데 사경회가 뭐입니까? 안 됩니다.’ 이라면서 뭐 놀래.

그래서, 쉬어 가라 해서 거기서 밥 먹고 자고 그 이튿날 아침에 나섰어. 나섰는데 초소가 일흔넷 초소라. 일흔넷 초막이라. 일흔넷 초소인데 거게 와 봐야 하루 종일 아무도 없어. 차도 없고 아무것도 못 다녀. 차도 못 다녀요. 그저 군인 차만 다니지 버스고 뭐고 그런 거는 하나도 없어요. 아무것도 못 다녀요. 들에 사람 하나도 없고.

그래 여게서는, 저게 가면 그 사람들은 죽일라고 기다리고 있는데 죽는다 하는 게 아니라 참새 한 마리도 주님에게 있기 때문에 주님이 안 죽이면 못 죽는다. 또 보자. 또 보자. 일흔넷 초소를 그때 한 칠십 몇 리를 걸어서 이래 갔어. 무사히 갔어.

그래 가며 나 혼자도 ‘여게는 꼭 죽는 곳인데 이곳을 가는 거 하나님이 뭐 할라고 지금 이라는고? 뭐 뜻이 있어 이라는데.’ 그래 내가 그뒤에 생각하기를 ‘네가 이렇게 고독한 걸음 걸어야 된다. 고독한 걸음 걸을 때에 이렇게 사망의 이 초소가 많이 있어도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너와 함께 하기 때문에 문제 없다.’ 하는 것을 이걸 나에게 보여 줬기 때문에 앞으로 내게 있어서 어떤 죽음의 선이 총총 놓여 있어도 상관없이 그때 나를 보호하시는 주님이 오늘도 보호하신다. 요단강을 건너게 하신 분이 지금도 보호한다 하는 것으로서 열두 그 초석을 둔 거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그 과거에 고난받은 것, 빨갱이는 나를 죽일라고 이래 가지고, 우리 집에 아내는 얼마나 혼겁을 쥐먹었든지 그만 낙태해서, 그거 순교가 될란지 몰라요. 하나 낙태해 버렸어요, 그만. 밤에는 이 집 밖에 그 장작을 가져오라 해 가지고 장작을 이 산더미같이 재놓고 막 불을 뺑  돌아 피워 놓고, 어떤 것이 여기 올까 싶어서, 인제 못 오도록 하기 위해 한다 하며, 그 위협 주는 거라.

그래 놓으니까 우리 집에 아무도 오는 사람 없어요. 그때 아이가 죽었는데 누가 올 사람이 있어야지? ○○○목사가 혼자 와 가지고 초상을 쳤어. 나는 지금 사경회 하러 돌아다니고. 여기 가면 여게서 잡으러 오면, 소문 듣고 잡으러 오면 저리 가 또 저기 가서 또 그날 또 집회 하고, 또 거기 가 소문 나 잡으러 오면 또 저기 가 집회하고, 돌아다니며 자꾸 집회만 하며 돌아다니는 거라. 집회만 하며 돌아다니며 소식만 듣고.

그랬는데 그 기적 한번 본 것은, 그 사람들이 나를 공연히 공산주의로 뺄갱이로 몰았어요, 뺄갱이로. 그 사람들이 인제 뺄갱이인데. 열다섯 놈이 뺄갱이인데 나를 뺄갱이로 몰아 가지고 뚜드리는데 이런 몽둥이 가지고 뚜드리니까 그 면에 있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공연히 예수는 헛일이다. 하나님이 계시면 저렇게 뭐 열심히 독실히 믿는 놈이 저렇게 뚜드려 맞을 리가 있느냐? 예수 믿는 거 다 헛일이다.

하나님은 안 계신다.’ 다 이랬는데, 그렇게 뚜드려 맞았는데 또 뻘떡 일어나 가지고 또 지서로 들어갑니다. ‘너거가 이렇게 불법 하고 이라니까 나를 뺄갱이로 모니까 너거 뺄갱이 아니가?’ 이래 가지고 내가 또 시비 걸라 하니까 ‘아이고, 그만 참으시이소’ 이래 가지고, 그라니까 그때에 토벌대 대장이 대구 장로님 아들이라. 거창 청년들이 그 소문을 듣고서 ‘우리가 지금ㅡ내가 그때 집사님인데ㅡ집사님이 허락만 하면 우리가 대번에 토벌대 대장에게 말해 가지고 그놈들은 뺄갱이기 때문에 전부 다 죽이구로 감옥에 뚜드려 넣겠습니다.’ 이래도 나는 그걸 허락 안 했어. ‘아니야.

너거보다 능한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다고 하신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주님이 갚아야 멋지게 갚지 너거는 갚을래야 멋지게 못 갚아.’ 그렇게 뚜드려 맞았는데 하나도 아프지 안해요. 이러니까 모두 죽었다고 야단인데 나는 하나도 아프지 안해. 그래 덜렁덜렁 걸어서 집에 가니까 아이고 맞아서 지금 다 죽어가니까 뭐 약 달여놓고 뭐 곰 해 놓고 이라는데 먹기만 잘 먹지 하나도 안 아파. 그거 이상해요. 아마 주님이 맞은 모양이라. 하나도 안 아파요, 그거.

이런 작대기가 몇 개나 뿌질라졌는데 하나도 안 아파.

이렇더니마는 한번은 지내니까 소식이 왔어. 그분들이 다 저리 제주도로 갔었는데, 제주도로 토벌하러 이동이 돼 갔었는데 열다섯이 한목 가 가지고 열너이는 직사하고 한 사람만 살아남아 와 가지고 소식을 전해.

그래 내가 그때 기도를 하나님 앞에 했어. 내가 그 사람들을 죄를 정하지 말라고 기도했더라면 좋은데 기도 안 한 죄를 자복을 하고, 그렇게 하나님이, 그 시원하지 안해요. 지금도 그라면. 그때 스데반 모양으로 기도를 했더라면 참 좋은 건데 기도 안 하니까 그만 그 사람들이 그 벌로 죽었는데 죽은 게 심판대 앞에 가면은 내가 어찌 되겠소? 기가 막혀. 스데반 모양으로 그때 ‘이들이 알지 못하고 하는 것이니까 죄를 정하지 마시옵소서’ 이랬으면 그들이 면했는데 그거 그라지 안하고 속으로 ‘이놈들, 하나님이 갚으실 거다.’ 내가 아마 그 소리 하고 말았을 거 같애. 그 죽어버렸어.

우리는 바로 믿을라 하면 고난이 있습니다, 고난이 있어. 고난이 어떤 고난이 있어? 그런 고난이 있어요. “고난의 큰 싸움을 참은 것을 생각하라 혹 비방과” 남한테 자꾸 비방, 헙니다. 이런 비방 저런 비방을 자꾸 듣고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비방당하지 환난당하지, 뭣 때문에? 주님 때문에 비방당하고 환난당해. 똑 주님 때문에.

비방당하고 환난당해서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이제 이거는 똑 노리개 모양으로 놀리고 뭐 구경합니다.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돼. 예수 믿으면 다 이런 걸 받아야 돼요. 받게 돼요.

구경거리.

주님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요물같이 괴물같이 구경거리 돼 본 사람 손 들어 봐.

구경거리 돼 본 사람 손 들어 봐. 이거 전부 맹꽁이네. 구경거리 돼 본 사람이 이렇츰 없어. 많을 건데? ○○○집사, 안 뚜드려 맞았어? 맞은 일 없어? 뭘로 맞았어? 뭘로? 장작으로? 맞았는데 그때 살아 있었어 까물쳤어? 살아 있었어? 까물치지는 안하고? 재미 있는 예수 믿었다.

“구경거리가 되고” 이렇게 주를 위해서 매도 맞아야 되고, 구경거리도 되고, 고난도 받아야 되고, 업수이 여김도 받아야 되고, 비방도 받아야 되고, 훼방도 받아야 되고 이런 꼴을 당해야 됩니다.

자, 여러분들 서로 사랑하는 자가, 사랑하는 자가, 사랑하는 자가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고난받는 것보다 더 깊은 연애가 있어요? 더 좋은 게 있을 수 있어요? 사랑하는 자가 자기 때문에, 자기 때문에 고난받은 그보다도 더 깊이 뜨거워지는 거는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전우가 서로 사랑합니다.

주를 위해서, 주를 위해서 고난당했지, 주님 위해서 훼방당했지, 주님 위해서 매 맞았지, 주님 위해서 갇혔지, 주님 위해서 멸시당했지, 주님 위해서 구경거리 됐지, 이라면 주님 앞에 가면 그게 후회가 될까요 좋을까요? 좋겠소 후회돼요? ‘나는 주님 믿어도 고난 하나도 없고 잘 먹고 잘 입고 모두 칭찬받았다’ 이랬으면 주님 앞에 나가면 그것도 그때도 좋을까요? 그때도 좋겠어요? 그때도 좋겠어요? 안 좋아. 안 좋아. 우리는 그 나라를 생각하고 살아야 됩니다.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어떤 사람은 이런 꼴을 당하지 안해도 이런 꼴 당하는 사람을 어짠지 그 사람이 사귀어져서 그 사람에게 가고 싶고, 그 사람에게 그 어려움 당하는데 피해 가기 싫고, 그 사람 어려움 당하는 데 눈물은 내가 나고, 그 사람 어려움 당하는 데 기도는 내가 하고, 그 사람 어려움 당하는 데 동정이 가고 마음이 가고 자꾸 그 어려움 당하는 그 사람의 친구가 되고, 그 사람에 동정이 가고, 그 사람의 벗이 되고, 그 사람과 나와 점점 가까와져. 그런 꼴은 느껴봤어요? 그런 꼴 느껴? 그것도 못 느끼면 아주 이거는 가짜야.

“사귀는 자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주를 위해서 고난받은 사람은 동정이 돼. 주를 위해서 갇힌 자에게 방문하기가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주를 위해서 갇힌 자에게 방문할라면 저도 갇힐 각오를 가져야 되지 그리 안 하면 방문 못 합니다. 방문 못 해. 그때도 우리 집에 그럴 때에 아무도 안 와.

오면은 그 사람들에게 잡혀 가지고 죽을 것이고 이렇기 때문에.

주기철 목사님이 감옥에 갇혔을 때에 다른 사람들이 방문을 못 가. 방문하면 방문 가면 주기철 목사패라고 형벌받을까 싶어서 아예 생명 내놓지 않으면 가지를 못해.

그때는 거창읍에 가면은 막 평소에 이렇던 사람이 악수하면 저거 예수 믿는 줄 알고 딱 형사들이 딱 보고 잡아갈 것이기 때문에 악수하는 사람이 없어.

악수할라고 저기 있는 것 보고 ‘안녕하십니까?’ 하고 손을 내면 그만 `아, 미안합니다. 실례합니다. 바빠서 그만 가야 됩니다.’ 도망가고 악수할 사람을 하루 종일 찾아다녀도 악수할 사람이 없어. 그렇게까지 예수 믿는 것이 어렵게 되는 그런 때가 옵니다. 뭐 지금같이 이런 줄 압니까? “동정하는 자가 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공연히 재물도 뺏깁니다. 공연히 논도 뺏기고, 밭도 뺏기고, 공연히 공장도 뺏기고, 자, 주 때문에 공장 뺏겨본 사람 손 들어 봐. 공장쟁이들 모두 안 뺏겨봤어? 주님 위해서 그라면 집 뺏긴 사람 손 들어 봐. 그것도 없고, 주님 위해서 논밭 뺏긴 사람 손 들어 봐. 하, 이거 참, 맹꽁이네. 없어? 다 주님 위해서 재산도 뺏기고, 인격도 뺏기고, 지위도 직장도 뺏기고, 명예도 뺏기고, 모든 안일도 뺏기고 다 주를 위해서 다 뺏기는 그것이 주님 앞에 설 때에 안면있을 주와 나와의 친밀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가서에 “정오에 사과나무 그늘에서 내가 쉰다” 하는 그 아가서에 해석은 뭐이냐 하면은 햇볕이 딱딱 쬐우는, 쬐우는 가장 고난이 심할 때에, 심할 때에 사과나무 그늘에 가서 쉰다 그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은 감옥에 들어가 가지고 쉰다 그말이오. 감옥에 들어가 가지고.

그러니까 흉흉한, 어떤 사람이 “흉흉한 파도 입고” 흉흉한 파도는 이 세상 분위가 시대가 흉흉해서 예수 믿는 사람이 발을 붙이지 못할 그때는 흉흉한 파도라. 그것이 우리에게 영광의 옷을 입히는 것이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흉흉한 파도가 오는 그것은 이제 영광의 옷을 입히는 거라. 고문과 고형의 잔치는 고문과 고형으로 이제 주님과 함께 지금 단 잔치를 지금 나누고 있는 거라.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주를 위해서 없어질 것 뺏기니까 영원한 세계에서 주님이 그거 갚아 주셔야지. 이 계산을 대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오늘 주님을 위해서 손해보는 거 무궁한, 주님 위해서 손해보는 거 암만 봐 봤자 없어질 것 손해라. 없어질 것 손해 가지고 영원 무궁토록 없어지지 안할 것으로 다 보상받습니다. 보상받아.

이러니까 이 계산을 하는 사람은 땅위에 자꾸 주를 위해서 고난당하기를 원해.

그러기 때문에 산다싱은 ‘하늘나라 가 가지고 십자가가 없으면 십자가 있는 곳으로 보내 달라고 기도하고 나는 십자가 있는 곳에 가서 살겠다’ 이렇게 말했어. 이 비밀, 비결.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너희가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여게 담대함은 무슨 담대요? 호랑이 보고 담대요 뭐 담대요? 무슨 담대? 여게는 “이 담대함을 버리지 말아라” 주님을 위해서 온갖 종류의 어려움이 올 때에 그 어려움에 벌벌 떨지 안하고 주를 위해서 오는 온갖 어려움은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달게 받는 그 담대 말이요, 그 담대. 주를 위한 온갖 어려움 온 거기에서 담대히 그걸 즐겁고 즐겁게 받는 것 그 담대, 그 담대가 우리가 있어야 됩니다.

주를 위해서 희생되는 거, 주를 위해서 고난당하는 거, 주를 위해서 박해당하는 거, 주를 위해서 멸시와 천대 모든 어려움 당하는 거 거게 대해서 벌벌 떨고, ‘그것 당하면 어짤까? 내가 주일 지키다 그것 당하면 어짤까? 내가 신앙 지키면 남편에게 배척당하면 어짤까? 내가 신앙 지키다가 직장에 쫓겨나가면 어짤까? 내가 신앙 지키다가 이 시국에 말려들어가면 어짤까? 내가 신앙 지키다가 감옥에 들어가면 어짤까? 신앙 지키다가 공산주의에게 맞아 죽으면 어짤까? 신앙 지켜서 옳은 설교 하다가 붙들려 가면 어짤까? 옳은 설교 했다가 공산주의 오면은 그거 가지고 다 이제 그때에 그거 가지고 붙들려 가면 어짤까?’ 그런 것 다 비겁한 것입니다.

“너희가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예수 믿는 사람은 주를 위한, 진리를 위한, 자기 신조와 교리를 위한 그 어떤 어려움이라도 무서워하지 않는 이 담대함이 있어야 됩니다. 이 담대함이 없으면 예수 바로 못 믿어요.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이것이 큰 상급을 얻어.

무궁세계에 큰 상급을 얻어요. 없어지지 안할 세계에서 큰 상급을 얻어요.

“얻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이런 어려움을 당해도 참고 견디는 것이 필요함은 “너희가